2010년 7월. [사랑의 하나님이 되어주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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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이스라엘에 갔을 땐 나는 비아(암미코)의 봉사자가 아니었다. 이스라엘이 건국된 후 척박한 땅을 재건하기 위해 그들을 공동농장의 형태를 갖추어 삶을 모색했고, 이 공동농장을 '키부츠'라 부르는데... 이스라엘 정부는 이 키부츠의 정착을 돕기 위해 해외 자원봉사자를 숙식제공을 지원해가며 모집해왔다. 나는 남아공에서 스페인의 산티아고를 거쳐 잠시 한국에 들어왔다가... 급히 다시 한국을 떠날 곳이 필요했고... 현실적인 조건에 부합하여 갈 수 있는 곳이 이 키부츠의 봉사자로서 떠나는 것이었다.
2010년 6월 중순. 이스라엘행 비행기를 탔고. 처음엔 북쪽 항구도시 하이파의 사과농장에 배정받았다가 하루 종일 공장에서 'apple packing' 하고 돌아와 몇 십명의 해외 봉사자들 사이에서 바글바글 우글우글 생활한다는 말에 짐을 풀기도 전에 그곳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가자지구 바로 가장 가까이에 있는 남미출신 유대인들의 작은 키부츠에 배정받아 그곳의 슈퍼마켓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물건이 떨어지면 재고파악해서 채워넣고... 대부분이 남미쪽 출신이라 일터에서 영어는 거의 무용지물이었고 손짓발짓 해가며 의사소통을 했다. 열댓명 되는 남녀 봉사자는 한 건물에서 생활했는데 밤마다 술판이 벌어지고 한 방에서 여자 봉사자 모두(5-6명)가 자는데... 한 밤중이면 술취한 남자 봉사자들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여자 봉사자들을 희롱하곤 했다. 여기까진 참을만 했는데.. 문제는 화장실. 너무너무 더러워서.. 식당이 있는 건물까지 5분여를 밤이고 낮이고 걸어다녀야했다. '주님 저 이러려고 여기까지 온 건가요.. 이건 아닌 거 같아요' 이곳에 오기 전 우연히 들었던 '비아 이스라엘(암미코)의 장애인 봉사단체'에 대해 더 알아보고 싶어서 어찌저찌 목사님 이메일 주소를 찾아내 일단 메일을 드리고.. 답변도 듣기 전에 덜컥 '나 관두겠다'..고 짐을 싸고 나와버렸다.
그렇게 한 달 후.. 나는 예루살렘에 있는 자폐장애인의 그룹 홈에 봉사자로 배정받아 목사님과 함께 에인케렘 지역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목사님께 물었다.
'저는 자폐장애인들과 함께 했던 경험도 없고, 히브리어도 거의 모르고... 그곳에 가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요?'
목사님이 분명하고 단단하게 대답해주셨고, 그것은 이후 비아와 함께하는 세월동안 항상 내겐 나침반과 같은 역할을 해주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머무는 곳에서 단 100m 정도도 나서기 힘든 삶을 사는 사람들이야. 너는 그들이 절대 가볼 수 없는 먼 땅에서 온 그곳의 문화와 그곳의 언어와 그들은 모르는 예수님을 아는 한국의 봉사자지. 너는 그들을 위해 기도해줄 수 있고, 너는 그들에게 한국을 이야기해줄 수 있고, 너는 그들의 다정한 친구가 되어줄 수 있을거야'
그즈음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난 늘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은 내가 경외하고, 두려워하는 분이야. 그리고 그게 다야. 내게서 너무나도 소중한 많은 것들을 언제든 가져가실 수 있는 분. 나는 그 분이 두려워'
그러면 언제나 한결같이 똑같은 대답을 들었다.
'언니가... 누나가... 당신이... 사랑의 하나님을 만났으면 좋겠어요. 기도할게요'라고.
속으로 '되지도 않을 말...'이라 생각하며 마침표를 찍곤 했다.
나를 보며 주변의 사람들은 썩 인간성 좋은 사람이라고들 평가하곤 했다.
착한 사람. 따뜻한 사람. 나아가선... 사랑이 많은 사람.
나는 나를 안다.
정작 내 속의 나는 이런 마음이었다.
내 미소, 내 배려, 내 친절... 이런 것들이 멈추고
나의 거칠고 냉소적인 모습을 있는 그대로 오롯이 드러내면
그래도 당신들은 나를 좋아해줄까.
2009년 10월. 하나님은 처음으로 당신의 음성을 통해 '너를 살리려고' 라고 말씀해주셨지만
나는 살아남은 것이, 살아지는 것이 참으로 어렵고 고통스러웠다.
멀쩡한 듯 밝게 웃었지만... 내 속의 나는 말라 비틀어진 지푸라기 같았다.
그렇게 봉사자로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자폐친구들 그룹홈 1호였던 그곳은 연령대가 가장 높은 친구들이 거주하던 곳으로 7명의 친구들이 각각 한 방씩 생활하며, 할 수 있는 만큼.... 누군가는 빨래 널기를 누군가는 샐러드 준비를 누군가를 청소를... 이렇게 소소하게 집안일도 거들게하고 낮에는 데이케어 센터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다양한 체육활동이나 음악활동, 산책 등의 일과로 하루를 지냈다.. 봉사자는 전문 인력을 보조해 때론 오후 스케줄을, 때론 밤부터 아침까지 일과를 함께했다. 자폐스펙트럼에 대해 조금씩 배워가며.. 하지만 솔직히 내가 배워가는 속도보다 자폐 친구들이 새로 온 봉사자인 나에대해 습득하고 받아들이고 적당한 거리를 조절해주는 것이 더 빨랐던 것 같다. 그들은 정해진 패턴대로 지내는 생활 속에서 안정감을 찾고, 변수가 생기면 큰 스트레스를 받곤했다. 미묘한 차이에도 갑작스럽게 나타나는 심각한 반응들. 때마다 그 정도도 너무 달라서 아주 심할 땐 잠시 방에 격리시켜야 할 때도 있었고... 그 전 단계 쯤 될 때는 어떻게 해야할 지 몰라... 히브리어도 모르고 뭣도 모르고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이 낯선 봉사자는 (그땐 아는 찬양도 없어서) 나즈막히 '케세라 세라'를 허밍으로 부르곤 했다. 그 그룹홈의 골칫덩이 사춘기 딸 같았던 나보다 한 살 많았던 M. 그녀는 유독 나의 케세라세라를 좋아했고 제어하기 힘든 상황속에서도 노래를 불러주면 갑자기 소리지르던 걸 멈추곤 내 팔짱을 끼고 '지니지니'하며 순한 양처럼 살갑게 내 어깨에 기대어왔다. M 뿐만 아니라 다른 6명의 친구들도.... 나름 각자의 방식으로 내게. 내게... 내 속엔 분명히 퍼석한 지푸라기 밖엔 없는 내게서. 사랑을 받아가는 듯 보였다. 나는 그들을 아꼈고, 소중하다고 여겨졌지만... 그건 내 사랑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전해진 건 내 진심이 아니었다. 나는 그런 진심이 애초에 없었던 사람이니까.
그것은... 온전히... '내 등에 그의 손을 대시고 고요히 그의 사랑을 그대로 흘려 보내시던' 하나님의 사랑. 이었다.
주께서 나에게 계속... 너를 사랑한다. 너를 사랑한다....고 외치셨더라면. 나는 계속... 믿지 않아요. 믿지 않아요..! 소리지르며 반박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 하신 일을 내가 목도하게 하심으로.. 그는 나를 증인되게 하셨고.. 마침내 나의 '사랑의 하나님'이 되어주셨다. 내 빈약한 입술로 그것을 고백하게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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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하나님께서 내게 하신 일들, 들려주신 음성. 알려주신 이야기들... 홈페이지 작업을 하다 어느날 문득 깨달았다. 오히려 이런 일들은 적어본 적이 없다. 너무도 선명해서 기억 못할까봐 서둘러 기록해야할 필요가 없었고, 너무 조심스러워 감히 글이라는 것으로 가둘 엄두가 안 났던 건데.. 이 이야기들이야말로 증언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시간 순서대로 메모만 해두고 이번에도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시간을 거슬러 그때를 떠올리면 아직도 생생한 당시의 그 순간을 마주해야 할 것이므로 뭔가 단단히 각오를 해야할 것 같았다. 하지만... 요즘에 계속 방황하며 겉돌던 게 혹 이 일을 미루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 오늘.. 이 주일을 보내며 그 중 두 가지 이야기를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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